2021년 12월 15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꼬꼬무) 시즌3의 9회 방송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22세의 나이에 스스로를 희생한 전태일 열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태일 열사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나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전태일 열사는 어떤 사람인가?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가이다. 청계천 평화 시장의 봉제 공장에서 일하다가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동 운동을 하였다. 그는 박정희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했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노동 운동의 발전과 근로 환경 개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각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출생 : 1948년 (2021년 기준으로 살아계셨다면 74세)
- 사망 : 1970년 11월
- 본관 : 정선 전씨
- 직업 : 노동자, 노동운동가
- 가족 : 어머니 이소선, 동생 전순옥, 동생 전태삼
- 학력 : 남대문초등학교
전태일 열사의 생애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대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너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 전에 중퇴하고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일을 하며 열악한 근무 환경과 고생하는 동료들을 보며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69년 평화시장에서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조직하였으나 공장 사장들에게 밉보여 해고당하고 막노동을 전전했다고 한다. 1970년 재단사로 다시 취직이 되어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 열사는 적극적인 노동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딱지와 훼방을 못 이기고 이에 대해 좌절과 비애를 느낀 전태일 열사는 결국 스스로 분신을 택하게 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 집회를 하는 도중에 경찰과 고용주들이 고용한 깡패들에 의해 당하게 되자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고 칭하며 불을 붙이게 된다. 이후 국립의료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숨지게 된다.
전태일 열사가 미친 영향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우리나라 사회에 큰 충격과 각성을 던져주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노동환경은 10년 이상 뒤쳐졌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전태일 열사의 사망 이후 주목받지 못하던 노동 현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노동조합 결성과 운동권 대학생들의 노동현장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후 전태일 열사의 가족들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하여 모두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이소선 여사는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2011년 작고하였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씨는 19대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비례대표 1번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외친 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분신 당시 외친 말)
박정희 대통령에게 요구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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